어린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이‌
향파 아동문학의 근본


어린이날 제정 100주년 특별전
< 향파와 어린이 > 코너에서는


‌향파가 다양한 사회 활동을 통해 보여준
 어린이 사랑의 실천을 소개하고자 한다.

맑고 순수한 어린이들이 
억압과 가난으로 인해 고통받지 않고,
마음껏 좋은 책을 읽으며, 즐겁게 뛰놀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향파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향파와 어린이

가난했던 어린 시절


향파는 1906년 경남 합천에서 이십 리 떨어진 영창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향파는 늦둥이로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비록 가난했지만 따뜻한 부모와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동무들과 마음껏 뛰어놀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편, 향파는 이 시기 평생 잊지 못할 만큼 두려운 경험을 겪게 되는데 그것은 붉은 테 모자에 긴 칼을 차고 덜거덕거리는 구둣발 소리를 내며 무고한 조선인들을 마구 심문하던 일본 순검들의 위협이었다.

당시 어린 향파가 느꼈던 공포는 인생의 마지막까지 잊혀지지 않았을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이 경험은 아동기의 경험이 어린이의 정서에 있어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지 이해하게 했으며, 훗날 선생의 교육 가치관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일이었다.

 

‌『소년세계』 1955년 6월호에 실렸던 「이런 구두닦이」라는 글은 향파가 어린이를 얼마나 애틋하게 사랑하고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거리를 걷던 향파는 구두닦이 소년의 성화에 못 이겨 구두를 맡기게 되었다. 꽤 마음에 들도록 광을 내준 소년은 거스름돈을 만들러 가서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무척 당황한 선생은 이내 본인을 탓하고 그 아이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나는 거스름돈을 못 받는 데 그치고 말겠지만, 그 아이는 양심의 가책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고통을 받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선생은 어려운 환경의 어린이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어린이들이 자신처럼 가난해서 굶거나, 억압의 고통을 당하는 일이 없기만을 바랐기 때문이다.‌

‌‌이것을 직접 언급한 일이 있는데 ‌ 학교 학보에 기사를 쓰기 위해 향파를 만나러 온 여학생들에게 했던 말이다.



‌“ 어른들의 세계는 어른 소설로서 발표하고 

어린이는 저희들끼리의 세계가 있지. 
어려서 내가 약간 불행했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고독하고 불행했던 내 소년 시절처럼 
지금 고독한 어린이들에게 
또, 못 사는 집에 태어난 어린이들에게 
자신의 서러움을 조금이라도 잊게 하고 
가난에서 극복하는 정신을 갖게 하기 위해 
동화는 심혈을 기울여 쓰고 있단다.”


- 부산계성여상 학보 『로고스‌』 (1973. 6) 7쪽. -



향파와 어린이

향파와 어린이날


매해 어린이날이 돌아오면 향파는 어린이를 위해 특별히 새로운 작품을 발표하거나 축하하는 글을 썼다. 동화시 「날아보고 싶은 꿈」(부제: 어린이날에 보내는 나의 많은 어린 동무들의 편지), 동시 「어린이는 자란다」‌, 「어린이날 큰 잔치」 등의 작품은 제목만 보아도 그 누구보다 어린이날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향파의 진심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러나 그가 늘 축하만 했던 것은 아니다. 「어린이들의 명절날」 < 부산일보 >(1961.05.05)은 어른들을 향한 쓴소리였다.

향파는 “정작 어린이날이라고 하지만 명절날에 어린이들이 마음껏 즐길만한 극장이나 도서관, 체육관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다가, 어린이들이 다양한 양서를 자유롭게 읽기는커녕 교과서 공부만을 강요 받는다. 과연 오늘이 어린이날이라고 기뻐하며 천진하게 즐길 어린이가 몇이나 되겠는가.”라고 한탄했다.


이처럼 ‌「어린이들의 명절날」은 지금도 어디선가 가난으로 굶주리고 억압받는 어린이가 있음을 생각하며 저술한 글이었다.

< 아래의 이미지를 누르시면 해당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

향파의 육필원고 중에는 어린이날 60주년을 맞이하여 썼다는 인터뷰 초고로 보이는 것이 있다.
어린이가 바르게 자라기 위해서는 어른부터 도덕적이고 정직해야 하며, 어린이는 어른의 일부가 아님을 명심하고 각자의 타고난 재능을 존중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글을 쓴 것은 1982년으로,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일기에 자주 썼던 시기이기도 하다. 향파의 필체는 본래 늘 반듯하고 질서 정연하다. 그러나 이 원고의 필체는 건강이 좋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듯해 일견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 아래의 이미지를 누르시면 해당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



향파와 어린이

어린이 사랑을 몸소 실천한 이주홍


‌해방 후의 사회, 정치적 상황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턱없이 물자가 부족해서 먹고살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이처럼 문화의 부흥은 생각하기도 힘든 환경 속에서 이주홍은 진정으로 어린이를 위한 길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모색하며 ‌문학의 불모지였던 부산에서 어린이 사랑을 실천해 갔다.

이주홍이 가장 먼저 한 것은 국어와 역사 교과서를 편찬하는 일이었다. 선생은 동래중에서 연극부를 만들고 학생극을 시작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이로 인해 동래중 연극부는 명실상부 부산 연극사를 시작하는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된다. 


또한, 1958년에는 ‘부산아동문학회’를 창립하며 부산에서 어린이문학이 자리 잡을 기틀과 토대를 마련했다.

1.   교과서 / 교육서 편찬


향파 이주홍은 교과서의 발행과 유통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유인본 문학 교과서를 적극 편찬하며 민족어와 민족사를 기반으로 한 문학교육 활동을 실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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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배재중학교 재직 시 사용한 『신국문선』, 『중등국문』, 『초등국사』, 동래중학교에서 사용했던 『신고국문선』을 엮고 편찬했다.


또한, < 부산일보 >에 장기간 연재한 작문법을 모아 『글짓기 선생』(창조사, 1963)을 책으로 펴냈다. 이 책은 「글의 세계」, 「동요 동시」, 「작품 연습」 등의 내용으로 어린이를 위해 쓴 것이지만 어른에게도 도움이 되는 교육서였다.

2.   각종 어린이 대회 준비 및 심사


1957년 어린이날 기념으로 ‘제1회 어린이 예술제’를 준비하며 부산에서의 어린이 행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아울러 한글 반포기념 제1회 ‘아동글짓기대회’(1958) 뿐 아니라 오랫동안 ‘어린이콩쿨대회’ 심사 위원으로 활동하며 어린이가 문예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또한, 새마을화극회에서 주최한 ‘아동의 정서교육’(1961.04.29) 강좌 등 수많은 부모 교육을 진행하며 어린이 교육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당시 ‘부산아동문학회’ 초대 회장이었던 이주홍은 아동문학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며 부산지역 아동문학의 산증인으로서 모두의 모범이 되었다.

‌3.   부산 아동문학 단체의 시작과 통합


부산 동래에는 『어린이』와 『신소년』의 지사가 있었지만, 정식으로 아동문학 활동의 시작이라 하면 해방 후부터이다. 1958년 이주홍이 최계락, 손동인 등과 함께 결성한 ‘부산아동문학회’가 부산 아동문학 단체의 시작이었다.

1973년에는 이주홍을 고문으로 하여 ‘부산아동문학회’가 창립됐다. 제1회 ‘부산어린이글잔치’를 열어 작품을 공모해 시상하고 이어 『부산아동문학』을 발간했다.
(표지 제자를 향파가 했다) ‌그러나 부산 아동문학 단체가 양분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는데, 내부의 갈등으로 1977년 ‘부산아동문학가협회’가 생긴 것이다.

‌다시 한마음으로 모이기로 논의가 된 것은 1984년 9월, 향파 이주홍의 대한민국문학상 수상 축하연 자리에서였다. 두 단체는 이주홍이 초대 회장직을 수락함으로써 ‘부산아동문학인협회’로 결성하여 새롭게 시작했고, 협회는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렇듯 ‌부산지역 아동문학 단체의 시작과 통합의 중심에는 언제나 향파 이주홍이 있었다.

4.   마음을 움직이는 연극의 힘


해방 후 선생이 서울 배재중(현 배재고), 부산 동래중(현 동래고)에서 교편을 잡고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바로 ‘연극’이었다.

연극은 관객과의 소통을 지향하고, 선동성을 지니기 때문에 혼란한 사회에서 성장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주기에 가장 적합한 예술 형태라는 생각에서였다.


‌동래중 학생들과의 연극은 당시 연극의 불모지인 부산 연극사에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큰, 의미 있는 활동이었다. 어린 학생들의 연극임에도 불구하고 부산 시내 대부분의 대형 극장뿐 아니라 대학의 초청을 받아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다.

‌동래중의 학생극은 주변 학교에 직간접적 영향을 미쳤는데, 부산지역의 많은 학교에서 연극부 활동이 활발해지며 향파의 작품을 다수 상연하기도 했다. 


동래중 학생들이 동년배인 동래가정고녀(현 학산여고)에 가서 연극을 지도하기까지 한 것을 보면 당시 위상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학생극, 대학극, 일반극으로 이어진 부산 연극의 첫 씨앗은 단연 향파가 뿌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향파와 어린이

향파와 『어린이문예』


향파 이주홍은 『어린이문예』 1979년 8월 창간호에 축사를 썼다. ‘어린이문예’가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을 이루어주는 든든한 후원자로서 앞으로 겪을 수많은 장애물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헤쳐 나가길 당부하는 내용이다.

향파 자신도 여러 잡지를 편집하고 주재한 경험이 있기에 ‌지역 문단의 어른으로서 누구보다 진심 어린 응원과 애정을 표현한 것이다.

부산 지역의 어린이 잡지 『어린이문예』는‌ 부산 아동문학인 협회의 필진과 부산문화방송 언론기관 등의 많은 노력으로 ‌40여 년 동안 신인 작가의 등용문 역할과 아동문학 작품을 발표하는 주요 무대가 되었다.

『어린이문예』에 실린 향파의 글과 작품


 

 

‌1979. 8

『어린이문예』 창간호 축사 「참다운 후원자」

‌1979. 12.~1981. 7.

연재소년소설 「바다의 사자」 (총 19회 완)

1982. 5.

동화 「돌소」

‌1982. 8.

나의 어린시절 「과자와 장난감」

1983. 1.

동화  「감나무 집에 효자 났네」

1984. 2.

동시 「빗방울」

‌1984. 5.

부산문화방송 창사25주년기념
제8회 500만 원 고료 작품 모집
심사평 「동시와 동화 결산」

1984. 8.

동시 「산속」

‌1984. 12.

동시 「겨울」

1985. 5.

동시 「뻐꾸기」

‌1985. 8.

어린이문예 창간 6돌 기념 축시
「작은 손을 흔들며」

1986. 1.

동시 「호선생 말씀」

‌1987. 2.

유고시 「살구꽃」, 대표시 「해같이 달같이만」

‌향파 선생 작고 후 『어린이문예』 1987년 2월호는‌‌  
< 사라진 한국문학의 큰 별, 향파 이주홍 선생님 > 특집호로 꾸며졌다. 
유고 시 「살구꽃」과 대표 시 「해같이 달같이만」이 실렸다.
『어린이문예』는 다음과 같이 향파 이주홍 선생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 향파 이주홍 선생님이 다시 못 올 먼 곳으로 떠나셨다.
팔십 고령에도 청탁 기일을 하루도 어기지 않고,
100매 200매를 써도 오자 하나,
맞춤법 하나 틀리는 법이 없는 선생님의 원고 쓰시는 자태는
모든 글 쓰는 이들이 본받아야 할 일이다.

특집 속에 들어 있는 유고 시 < 살구꽃 >은
지난 12월 10일께 받은 작품이다.
분명히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지금도 온천동 그 골목을 들어서면
참새 지저귐 속에서
해맑은 모습으로 반겨 주실 것만 같은 선생님,
편안히, 편안히 잠드시옵소서.”

‌『어린이문예』 선용




[부록]

언제나 희망과 용기를 길러주는 잡지‌
『어린이문예』

『어린이문예』 는 부산 지역뿐 아니라 
전국의 좋은 작품을 골고루 실어 
한국 아동문학의 발전과 
어린이 문화예술의 부흥을 이끌어 나감으로써 
우리나라의 어린이 잡지 발행사에 한 획을 그었다.‌

『어린이문예』는 1979년 ‘세계 아동의 해’를 맞이한 기념으로 1979년 8월호로서 창간호를 냈다. 이 잡지는 비단 잡지사 단독으로 운영된 체제가 아니었다. 부산문화방송이라는 언론기관이 발행소가 되어 주었고, 부산 아동문학인 협회의 작가들은 필진으로 참여하면서 실질적인 잡지의 콘텐츠를 구성하는 힘이 되어 주었다.

‌‌‌부산문화방송은 창사 기념사업으로 고료를 걸고 ‘신인문예상’을 개최했는데 이를 통해 발굴된 아동문학가들은 『어린이문예』에 소개 및 작품 발표를 하며 아동 문단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대중매체의 적극적인 지원과 더욱 활발해진 부산 아동문학은 『어린이문예』가 당대 어린이 문화예술의 부흥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고 문학, 예술 전반으로 시너지를 내었다.

또한, ‌『어린이문예』는 ‘어린이문예대상’을 매년 실시하여 어린이들의 작품을 발굴하고 재능을 독려하는 한편 어린이 관련 극단을 협찬하며 아동 예술 보급의 역할을 했다.

아울러 창간호부터 어린이들의 자발적 참여와 소통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는데, ‘어린이’를 문예활동의 주체로 인식하고 있는 점은 방정환의 『어린이』와 지향성은 같지만, 여기에 『어린이문예』는 부모와 교사를 위한 교육적 페이지도 부가하였다. 따라서 어린이의 바른 성장을 위해 어린이-부모-교사의 상호 연대를 만들었다고 평가받는다.


[이미지 출처]‌
이주홍문학관 소장자료 제외한 외부자료 순차적 기명

[부산일보 - 지면보기 누리집]
이주홍. (1985.05.05). 어린이날 큰 잔치. 부산일보.
이주홍. (1961.05.05). 어린이들의 명절날. 부산일보.
어린이날 기념 제1회 어린이 예술제. (1957.05.02). 부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