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파 이주홍
‌‌삶과 생애


1906 - 1919

향파 이주홍 선생은 1906년 5월 20일 합천군 합천읍 배양골(巳里)에서 소농이었던 아버지 이정식과 어머니 강정화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향리의 서당과 합천초등학교를 거치면서 전통 한학과 신학문을 아울러 배운 그는 일찍부터 또래 소년들과 『삼우(三友)』·『형제(兄弟)』와 같은 회람잡지를 만들면서 문학의 꿈을 키웠습니다.


합천의 한시 대가였던 외숙 강만달의 가르침을 받았고, 동생 이성홍 또한 어릴 적부터 오랜 글벗이었습니다.

선생은 1918년 합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던 중 1919년 3·1 독립운동을 맞았습니다.

 

1920 - 1924


14세 어린 나이의 그는 3·1운동의 양상에서 나라의 앞길은 새 문물, 새 학문에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가정 형편상 새 학문을 위한 진학의 뜻을 펴기는 어려운 실정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1920년 고학이라도 하려고 단신으로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사고무친의 서울에서 껌과 은단을 팔고 신문을 배달하며 고학의 꿈을 이루려 했습니다마는 정규 중학 진학의 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좌절할 수는 없었습니다.

1924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일본은 그 당시 우리나라보다 서구의 신문물을 먼저 받아들여 고학의 길도 쉬우리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낮에는 지게를 지고 인력거를 끄는 고된 노동을 하고 밤에는 동경 정칙영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웠습니다.

주경야독하는 삶은 뒷날 인간 존재의 의의를 헤아리는 체험적 예지로 열렸습니다.

 

1925  -  1929


1925년 이국땅에서 쓴 「뱀 새끼의 무도」가 모국의 『신소년』에 발표된 일은 그 어려운 생활 속에서 얻어진 문학적 예지라면, 1928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우리 교포 자녀가 우리말 우리글을 잃어가는 실정이 안타까워 양인환 씨와 근영학원을 설립하여 교사 노릇을 한 것은 나라와 겨레의 내일을 염려한 실천 의지였습니다. 

조선 아이들에게 조선말과 역사를 가르키고 연극 공연을 통해 민족의식을 드높였습니다. 그 일로 1929년 일본 경찰에 의해 추방 명령을 받고 일본을 떠나 귀국했습니다.

 

1929    문단 등단 - 해방 전


1929년 서울로 돌아와 자신이 일찍이 『신소년』에 투고했던 「배암 색기의 무도」가 1928년 5월호에 당선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소년사에서 편집 일을 맡은 이주홍은 1929년 12월 『여성지우』에 「결혼 전날」이 입선되면서 소설가로도 나섰습니다. 그때의 『신소년』은 경영이 지극히 어려울 때였습니다.  그는 동요, 동화, 동극은 물론 표지화, 컷, 삽화, 만화까지 혼자서 하는 노력과 재능을 발휘하여 어린이의 꿈을 살려 갔습니다. 

그는 『신소년』 편집에 그치지 않고, 카프(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의 아동문학 기관지인 『별나라』 편집에 참여하면서 창작 · 출판 미술 · 편집에 뛰어난 재능을 떨쳤습니다. 소설, 시, 희곡, 시나리오 등을 국내 잡지에 발표하면서 우리나라  문학 초창기를 열어갔습니다.

 

1931년 프로레타리아 동요집 『불별』과 『농민소설집』 발간을 이끌었고, 잡지『집단』에서 활동하다가 1934년 제2차 카프 검거로 한동안 일본 경찰에 쫓기면서 낙향했습니다. 1936년에는 종합문예지 『풍림』 창간에 동참하여 편집을 맡았습니다. 1939년에는 잡지 『영화·연극』 편집을 주간했습니다.

 

1940년에는 잡지 『신세기』의 편집장으로 일했습니다. 시나리오 「여명」을 발표하면서 사상 탄압과 시대적 암울 속에서도 문학을 향한 열정을 꽃피웠습니다. 

향파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1940년대는 극심한 가난과 고통 속에 만화와 출판 미술로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신소년』(1930년 8월 호)의 「여름방학 지상좌담회」 참석자 사진

뒷줄 왼쪽부터  > 
  이구월, 손풍산, 늘샘(탁상철), 양우정, 이주홍, 엄흥섭
앞줄 왼쪽부터  > 
  신고송, 김병호

 

 

 

 

그 당시 일제가 우리말 우리글의 말살에 혈안이 되어 있을 때가 되어 그는 일본 경찰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있었습니다. 마침내 1945년 봄 서울에서 체포되어 거창검사국에 수감되었습니다. 감방에서 풀려난 것은 1945년 8·15 광복 다음날인 16일이었습니다.

광복 뒤 향파는 배재중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연극이야말로 새 민족 국가 건설을 위해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된다는 믿음으로 희곡 창작과 연출 활동을 이끌었습니다.

또한 < 조선문학가동맹 >에 들어가 시분과, 미술분과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광복기의 굵직굵직한 주요 잡지와 낱책들의 출판미술을 도맡아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초등국사』를 발간하여 일제로 해서 상실한 우리의 국사 교과서를 되살렸습니다.

 

1947년 부산 ~


1947년에는 부산으로 자리를 옮겨 동래 중학(현 동래 고교) 교사, 1949년에는 수산대학(현 부경대학교) 교수로 근무하면서 연극 운동과 문학의 저변 확대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것이 문화의 불모지 부산이란 그때였습니다.

그의 창작은 아동문학, 시, 소설, 희곡, 평론, 시나리오 수필, 중국 고전의 번역 등 문학 전 영역으로 펼쳐지면서 회화와 서예까지 그 재능을 발휘하였습니다.

1966년에는 『문학시대』를 창간하여 문화의 불모지 부산은 물론 한국문학을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 뒤 『문학 시대』 『갈숲』 편집을 통해 부산·경남 지역 문학의 뼈대를 다듬는 향파는 1972년 수산대학교를 정년퇴직할 때까지 왕성하고도 꾸준한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83년 와병에 들어 1987년 1월 3일 향년 81세로 영면하였습니다.

‌1957년

‌제1회‌
부산시 문화상 (문학)

 
1962년

제1회
경상남도 문화상

 
1963년

제1회
부산대학학술공적상

 
1968년

제10회
눌원 문화상

 
1979년

대한민국예술원상 공로상
문학부문

 
1983년

제1회
한국불교아동문학상
‌(한국불교설화‌選)

 
1983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1984년

대한민국문학상 본상
( 동화집   사랑하는 악마 )

 
1987년

제28회
3·1 문학상
‌(중편소설   깃발 가는 곳을 향하여)

 
그렇게 부산에서 활동한 햇수는 40년이었고 일본과 서울에서의 활동을 합하면 60년이 됩니다.

60년 동안의 문학과 일반교양 저서는 각 출판사의 기획출판으로 중복된 것까지 합하면 200권 정도가 될 것입니다.

선생의 작품을 각 장르별로 평한 평가들의 평은 인간성의 옹호와 회복을 위한 휴머니즘의 세계라 하고 있습니다.